오늘은 신대방역에서 출근했다. 우리집은 신대방역과 신림역 사이에 있고, 회사와 더 가까운 건 신대방역이지만, 평소엔 굳이 신림역에서 신대방을 거쳐서 간다. 신림역으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우리집에서 더 가깝기 때문이다. 덜 붐비기도 하고. 신대방역으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은 집에서도 멀고, 버스 크기도 더 작은데 사람은 많다. 그래도 가끔은 신대방역으로 출근한다. 날씨가 좋아서 밖에서 좀 더 걷고 싶을 때, 음악이 흥겨워 사람들 없는 데서 춤추면서 걷고 싶을 때.
출근한 지 10분 만에 회의에 들어갔다. 회의에 맞춰 겨우 출근한 거다. 실험 조직으로 개편하기로 한 다음 잡힌 첫 킥오프 미팅이다. 마케터가 한참 실험 가설과 그 가설을 선택한 이유, 검증 방법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백엔드 개발자는 의견만 내면 되고 작업할 건 없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듣다보니 심각해졌다. 하는 김에 개선하는 건이 생각보다 많았다. 실험은 변수 통제가 관건 아닌가. 이렇게 한꺼번에 다 고치면 뭐가 변인인지 어떻게 안다는 걸까. 그렇지만 내 작업 범위는 아니니까 되도록 말을 아꼈다. 프론트엔드와 앱 개발자는 할 말이 많아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질문 있으세요? 하자마자 여기저기 오디오가 겹쳤다. PM은 왜 지도 검색에서 멀쩡한 필터를 제거하냐고 했다. 마케터는 어차피 프리셋 필터가 있고, 영구적으로 수정하는 게 아니라 비율 5:5 A/B 테스트로 노출할 거니 데이터 보고 판단하자고 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다만 무적의 논리였다. 그렇게 따지면 검증할 가설 간의 우선 순위를 매길 수 없다. 뭐든 어차피 실험일 뿐인데 못할 게 뭐냐, 데이터 뽑아보자 하면 그만이니까. PM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제품팀 리소스를 사용할 거면 자기를 설득하라고 했다. 이건 피드백 받는 자리가 아니에요, 제품팀에서 일정과 리소스 조율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마케터가 맞섰다. PM 왈 왜요? 제 피드백 안 받을 거면 이 미팅의 의의가 뭐죠? 마케터 왈 그런 거 안 하고 빠른 실험하려고 조직 개편한 거니까요. 머리 긴 여자들끼리 싸우니까 기가 쪽 빨렸다. 어리고 일 열심히 하는 여자들, 일을 사랑해서 목에 핏대 세우는 여자들 앞에서 그저 아침 커피를 아직 못 마신 나는 너덜거리고 있었다. 아, 이 나이 먹고 앉아서 이런 거 하나 중재 못하고 뭐하는 거야? 싶어 CTO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도 나 못지 않은, 어쩌면 나보다 더 심한 심약자였다. 정신 건강을 최우선 순위로 돌보고 산다는 그의 평소 발언 답게 그는 정말 뛰쳐나가고 싶어 보였다. 이 얘기는 회의 끝나고 더 하시죠, 마지못해 CTO가 말했다. 끝나고 뭘 더 얘기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전혀 믿음이 안 갔다. 회의가 끝나고 따까리들은 썩 나가라고 CTO가 두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환기도 안 되는 회의실을 나왔다. 6인용 회의실에서 7명이서 회의를 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산소가 부족하니까 예민해지잖아.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가져오지를 않았다. 요즘 집 앞에서만 가끔 담배를 피운다. 사실 2주 전부터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다. 중학교 때 이후 처음으로. 그치만 회사에서는 도무지 피울 맛이 안 난다. 흡연 구역도 거의 없는 데다가, 그 몇 안 되는 흡연 구역에 아저씨들만 득실거린다. 아저씨. 배 나온 아저씨. 못 생긴 아저씨. 나는 아저씨가 싫어요. 와이프 있고 일 잘하는 아저씨는 더 싫어요. 열폭하게 되니까. 아저씨들은 왜 이렇게 나약할까?
개발자 주간 회의에 CTO가 이번 주에 읽을만한 아티클이라며 링크를 잔뜩 가져왔다. 죄다 AI로 글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기술 문서, 기획서, 설계서 검토하기가 심히 불편하시단다. 나도 AI로 쓰고 싶지 않아요. 초안부터 내가 써야 윤문도 수월한 거 알죠. 암요. 근데 일정은 빠듯하고 산출물은 정해져있는데 어느 세월에 휴먼굴림체로 하나하나 쓰고 있겠어요. 라고는 말을 못하고. 각자 반성의 시간을 갖자고 하는데 마치 남의 일인 것마냥 그러게요, 러다이트 운동을 해야할까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집에 오는 길엔 백현진 아저씨의 앨범 <반성의 시간>을 들었다. "내 목구멍이 재떨이 되네 내 목구멍이 우물이 되네 영락없이 기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