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요지경 속으로에 연재하는 산문을 옮겼습니다.
롤리폴리라는 연재명을 붙여놓고서 내내 개dog 이야기만 했다는 걸 깨닫고 가상의 독자에게 송구한 마음이 든다. 물론 나에게 사랑이란 종을 초월한 화학작용이고, 식구가 하나 더 늘면서 '쓰리썸플레이스'라는 우리 집의 당호堂號를 포썸플레이스로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여 아주 동떨어진 소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장은 돌봄 노동량이 늘어 새로운 인간과의 연애 같은 건 엄두가 안 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에 '헌신'하는 폴리아모리스트 정예인이다. (이래놓고 금세 또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음. 예측 불가 인생.)
그나마 전 여친들과 요즘 잘 지내는 것 같다. 에세이 <최선의 사랑>에 '한이'로 등장한 연상녀 H, 그리고 서정과의 결혼식에서 축사까지 해주었던 연하녀 E에게 자주 연락이 오는데, 각각 내가 느끼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한 만큼 응하고 있다.
H는 우리 집 딸들(고양이 정연지, 강아지 노호지)에게 관심이 과하다. 혈연 그 이상의 수준으로, 맡겨놓은 듯 매일 사진과 영상을 요구한다. 덕분에 애들을 더 자주 찍게 된다. H에게 보낸 김에 몇 명에게 더 보내면서 우리 애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자랑할 기회도 슬쩍 만든다. 운동 부족인데 노화까지 덮친 몸뚱이를 이끌고 갑작스럽게 하루 2회 개 산책 루틴을 열정적으로 수행하다가 족저근막염에 걸린 내게 H가 스케쳐스 운동화를 보내줬다. 으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 그래서일까. 최근 아내 서정이 '예인 친구 중 가장 친밀하게 여기는 3인'을 꼽았는데 그 안에 드는 영광을 차지했다. 나도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가장 작은 반경에 누가 있는지 떠올렸을 때 H가 거기 함께 있는 family로 느껴진다. (가족이라는 말은 어쩐지 내 삶에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이렇게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어 좋다.
E와는 사귄 기간이 짧았고 헤어진 지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니라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내 쪽에서 보낼 '요청의 건'이 발생했다. 영화를 좋아하는(씨네필은 아닙니다) 나에게 중요했던 그의 역할 중 하나는 영화 메이트. 직장인인 아내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다 에너지 레벨이 낮아 두 시간 남짓 영상을 보는 행위를 하려면 꽤나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만큼 자주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최애 장르인 공포/스릴러 쪽은 아내를 비롯해 동생들, 주변 친구들 전부 기피하는 터라, 나로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적극적으로 즐기는(a.k.a. 문화이론 석사생) 애인이 무척 반가웠다. 그게 헤어지고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궁금한 영화가 생겼다. 영화적 체험 그 자체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섭다는 평이 즐비해서 더 호기심이 갔다. 역시나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동행을 거부하고 결국 혼자 보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더니 해당 영화를 이미 본 누군가가 그것만은 비추라고 말려서 잠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마침 그때 안부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덥석 물었다. "시간 맞으면 언제 영화나 볼래?"
연애 포함 도합 16년을 함께한 전 남편과는 두절됐다. 이것이 나의 깊고 커다란 슬픔이다. 그도 재혼을 했는데 그쪽 배우자가 나와의 교류를 불편해해서 받아들였다. 같이 살 때는 한 번도 꿈에 나오지 않던 그가 요새 툭하면 꿈에 등장한다. 스무 살부터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고 많은 경험을 같이 한 사람. 아직도 불쑥 일상을 찢고 침입하는 추억들이 한가득인데 그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헤어져도 끊어지지 않기로 했었지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헤어지는 걸 잘 못하는 나의 어쩌면 유일한 이별. 사라지면서 더 커진 구멍. 새로 쓰이지 못한 상실.
결혼식은 힘들어도 재밌으니까 여러 번 하겠는데, 이혼은 두 번은 못하겠다. 아무래도 아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그러면 누굴 또 사귀다 헤어져도 서정이가 달래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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