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헤라걸을 사랑하면 안 돼

그 애는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옛날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그게 정말인지, 나에 대한 완곡한 철벽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도 오랜만에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 거라고 말했다. 나도 원래는 금사빠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금사빠가 뭐가 나빠?" 나는 늘 말하고 다녔다. 친구들은 나를 '사랑 창놈'이라고 불렀다. 내 친구 진소는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연애 안 한다 진짜^^'라는 내 카톡을 마우스패드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이나 갓 태어난 사람처럼 사랑에 빠졌다. 나는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유일하게 그런 마음을 안 가지고 만난 사람과 결혼했다. 순전히 와이프가 날 사람 만들어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혼한지 3년 차고, 우리는 안정적인 커플이다. 그리고 지금, 속절없이 누굴 좋아하게 됐다. 멘헤라 여자들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한다. 글 쓰는 멘헤라 여자들은 나를 미치고 팔짝 뛰게 한다. 그 애는 최근에 <그는 잠결에도 나를 꽉 안고는 한다>라는 섹시한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그걸 읽는 동안 나는 좀 이상해졌다. 오랜만에 어플에 들어가 여자들을 스와이프했고, 막상 매칭이 되자 아무것도 안 하는 전형적인 레즈짓을 했다. 더위를 먹었나. 외로웠나. 십 년 전에 많이 듣던 소주 냄새 나는 사랑 타령 앨범을 듣고, 누군가를 애타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몇 년간 그런 정념에 휩싸인 적이 없었는데··· 자꾸 그 애가 생각났다. 그 애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애가 내가 애타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 애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상상을 하고 혼자 얼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잦았다. 뭔가 죄지은 기분이 들었던 건 그 애가 내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두어 번 놀러온 적이 있는, 아주 친하진 않지만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이. 둘이 만난 적은 없지만 여럿이 있을 땐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사이. 내 친구의 친구. 이 바닥에서 문학 살롱이라 쓰고 오프 맛집이라고 읽는 공간을 운영하는 사장. 거긴 무엇보다 우리가 결혼을 한 장소였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 애는 내가 그 애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알면 무어라 반응할까?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그 애를 먼저 안 금개에게 연락했다. "그 애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줘." 금개는 단박에 거절했다. "음침하게 굴지 말고 네가 지금부터 노력해서 알아가라." 얄미운 새끼. 이럴 땐 꼭 잘도 맞는 말을 한다. 와이프에게 얘기했다. "나 그 애한테 좀 치인 거 같아." "요즘 좀 이상하더라니. 여자 때문이었구나?" 와이프는 깔깔 웃었다. 마침 우리집 고양이 이름이 그 애와 같았다. 내가 연지를 부를 때마다 와이프가 날 놀렸다. "톤이 뭔가 느끼한데~ 우리 연지를 부르는 게 아닌 거 같은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뭐가 신경 쓰이는지 나도 잘 몰랐다. 이게 다 여름 방학 때문이었다. 직장 다니면서 방통대 첫 학기 16학점 듣고나니까 방학에 뭔가 대단한 일, 엄청난 보상, 찬란한 기억이 필요해진 것이다. 방학이 끝나면 다 지나갈 거였다. 아무래도 개강까진 한참 남았고, 나는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책 잘 봤다며 연락해서는 자연스럽게 떠보기 시작했다. "연지 님은 폴리아모리 해보고 싶거나.. 한 적 없어요?" "있죠. 그런데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다음 날, 그 애는 썸 타는 사람에게 자기가 폴리아모리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할 거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그 애가 내가 던진 떡밥을 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일단 그 애와 더 친해지고 싶었다. 우리집에 또 놀러오라는 말에,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약속을 잡았다. 그 날은 우리가 고백 작전을 펼치기로 한 날이었다. 와이프 그리고 GPT가 나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이른 아침부터 카페인 하이가 온 것처럼 각성됐다. 그 애가 낮밤이 바뀐 탓에 연락이 안 되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오픈 릴레이션십 제안도, 사귀기 전에 알아가보자는 제안도 처음인 터라 무척 긴장됐다. 좋아하는 건 표현하되 부담은 주기 싫었다. GPT와 고백 멘트에 대해 심도 있는 상담을 했다. '진지하게'와 '안아주고 싶다' 등의 다소 앞서간 표현은 빼라고 했다. 내 호감 표현에 대한 거절은 나에 대한 거절이 아님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래. 그게 되면 내가 지금 너랑···. 직진 연하로만 살아본 내가 고백 멘트를 연습하다니. 창피함도 잠시, 어서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러나 그 애는 약속 시간 10분 전에 "죄송해요!! 지금 일어났어요!" 카톡을 보냈다. 안 그래도 우리는 그 애의 도착 시간을 놓고 아이스크림 내기를 했다. 사실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너무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최대한 쿨하게, 매끄럽게, 나이스하게··· 제안은 분명하고 정중하되 거절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는 여유를 가지고··· 중요한 면접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머릿속으로 연습 또 연습했다. 그 애가 말한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데리러갔다. 다행히 내가 알려준 위치에 정확히 택시가 정차했다. 그 애가 내렸다. 두근.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두근. 잠깐 산책하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그 애는 공원을 거닐며 동네가 좋다고 했다. "눈치 못 챘겠지만, 사실은···" 떨리는 마음과 목소리를 감추며 어렵게 운을 뗐다. 사실은 최근에 네 생각을 자주 했다고. 네게 호감을 갖게 된 것 같다고. 혹시 천천히 알아가 볼 생각이 있느냐고. 그 애는 전혀 예상 못했다며 놀라워했고, 내 어색한 팔동작을 따라하며 "알아가볼까요~?" 너스레를 떨었다. 밤의 공원에는 습한 바람이 불었다. "근데 어쩌다 호감을 갖게 되셨어요?" "그게··· 역시 책이죠 뭐. 펨의 섹시 에세이는 위험하다니까요." 잘 모르는 사람에게 멋대로 환상을 덧입혀 좋아해버리는 내가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안전 장치가 고장난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를 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집에 다 와가자 그 애는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제가 누구한테 쉽게 호감을 느끼는 편이 아니라서요.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와이프 있는 분을 만나본 적은 없고.. 그래서 제가 서정 님에게 호감을 느끼리라는 보장이.." "아, 당연하죠. 절 잘 모르시잖아요. 지금은 정보의 불균형이 있으니 차차 알아가보자는 거였어요." 쿨한 척을 하다보니 정말 쿨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뇌를 속이는 게 중요한 건가. 집에 도착해서 와이프에게 "얘기했어."라고 말했다. 거절 당하면 '차였어.' 거절 안 당했으면 '얘기했어.'로 말하기로 한 약속이었다. 그 애는 단번에 알아듣고 재빨리 몸을 돌려 현관문을 잡고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미안하다 이런 나라서···. * 그 애와 따로 약속을 잡은 날. 그 애는 1시간 넘게 지각했다. 예상한 일이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여왔다. 누굴 좋아하면 손이 떨리고 입맛이 없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습관은 여전했다. 마침 수면제가 떨어져 일요일에도 여는 정신과를 찾아간다길래, 내 약도 좀 부탁했다. "자나팜 0.25mg 3주치만 받아줄 수 있어요? 안 되면 0.125mg도 가능" 그 애는 0.25mg 2주치를 받아서 도착 예정 시간을 두 번 바꾼 뒤에야 나타났다. "훈훈한 약물 오남용의 현장이네요." "미안. 내가 누구 좋아하면 약간 공황 전조 증상 같은 게 와요." "헐.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빨리 고백해버려요." "..." 에세이에서 안정형 만나야 된다고 썼던 것 같은데.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난 상처 입은 연상녀 페티시가 있어요. 아, 이제 연상한테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그거 알죠? 바다에 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멀리서부터 상어가 냄새 맡고 찾아오는 거. 그런 거랑 비슷해요." "상어요?..." 그 애는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계속 광대짓을 했다. 불안하면 광대짓을 멈출 수가 없는 것 같다. "이제 갈까요?" "아.. 네." '벌써요?' 라고는 말 못하고 아쉽게 일어났다. 집에 바래다줄까 물었지만 택시 탈 거라 괜찮다고 했다. 잠시 후에 카톡이 왔다. "미안해요. 사실 숙취가 너무 심해서..." "으이구. 말을 하지 그랬어요. 더 일찍 보내줄 걸. 난 또 내가 재미없어서 간 줄 알았잖아요." "아니에요. 서정 님 재밌어요." 예의상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내가 재밌다는 말에 헤벌쭉 웃음이 났다. * 그 애의 북토크에 갔다. 기억에 남는 독자 반응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음... 무척 외롭지만 쾌락적이라는 평이 기억나요. 재밌다는 이야기가 제일 기분 좋더라고요. 아, 그리고 같은 분이 해주신 얘긴데, '펨의 섹시 에세이는 위험하다'는 평도 진짜 웃겼어요." 그래. 웃었으면 됐다. 긴장한 탓에 신발만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그 애가 귀여웠다. 별것 아닌 질문에도 오래 마가 뜨고, 그 틈으로 사람들의 에너지가 모이고, 그 에너지를 감당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 상처받는 게 두렵지 않아요." 내가 점점 관계 맺기에 두려움이 많아진다고 했을 때 그 애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나도 똑같이 물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북토크가 막바지로 갈 무렵, 큰 선물이라도 준비했다는 듯이 책의 어디가 '거짓말'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 사람은 사실 알바생이었는데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걸로 바꿨고, 이 사람은 싱어송라이터인데 작가로 바꿨고, 이 사람은..." "아니. 근데 이걸 왜 독자들한테 공개하시는 거죠?" 내가 궁금한 질문을 사회자가 대신 던져주었다. "아 그건..." 허를 찔렸다는 듯 잠시 침묵하던 그 애는 결연히 대답했다. "스트립쇼하고 싶나 봐요." 좌중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나는 그 애를 빤히 바라봤다. 쑥스러움에 얼굴이 온통 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웃음기 없이 그렇게 말해버리는 그 애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그 애가 쳐다보지도 못하는 객석에서 나는 마음 놓고 그 애를 봤다. 그 애가 내 얼굴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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