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점심 약 또 두고 나왔다

롤링썬더포이트리클럽 1주차만을 남겨두고 있다. 타인의 시를 받아 다시 쓸 때마다 어쩜 그렇게 원작자의 흔적을 지우고 그 시기의 나로서 새로운 시를 쓰게 되는지. 요즘에 도 닦는 나날을 보내서 그런지 이번 시의(지호의 시를 누누와 페이건을 거쳐 예인이 다시 씀) 화자가 단독자, 어떤 차원을 넘어선 인간, 데미갓 같다는 피드백이 쏟아져서 놀랐다. 이 자아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난 적은 처음이다. 이 자아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나에게 종종 '인간미 없다'고 하는 서정에게는 간파당했다. 내가 진짜로 약해질 때는 '매섭다'고, 이틀 전 서정이 말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수긍이 됐다. 최근에 신경질과 짜증이 늘긴 했다. pms를 거쳐 월경 기간 중이기도 하고, 덥고 습한 날씨에 쥐약인데다 비 오는 저기압 기상에 신체적으로도 직격타를 맞는 편이다. 그런데 진짜 그런 게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정신과에다가는 그런 이유를 둘러대고 약을 유지했다. "나 왜 우울해?" 서정에게 물었다. "꼭 한번씩 그렇게 얘기하더라." 
서정을 처음 만난 날 느낀 확신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더욱 크고 선명해진다. 이런 말을 하면 서정은 내게 참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팔자가 사납다고 그런다. 내가 처음 써갔던 청혼 시는 다른 멤버들을 거치며 신혼 시가 되었다가 오늘은 곧 이혼할 것 같은 시가 되었다. "이 화자는 착하네요. 그런데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회피하는 걸 보면 심약한가 싶기도 하고요." 써온 분이 움찔하며 그런 것 같다고, 예인 님은 사람을 잘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를 가리키며 한 말은 아니었지만 시라는 게 그렇게 얄궂어서... 아니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다.
어제는 내가 좋아하는 서촌에 잠시 머물렀다. 처음 가보는 서점에서 <적정 코미디 기술> 북토크가 열렸다. 거기 가니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예상치 못한 얼굴도. 표정과 몸짓을 한껏 쓰면서 애정과 반가움을 표했다. 스탠드업코미디를 선보이는 서연 님 말이 끝날 때마다 속절없이 포복절도했다. 작정하고 코미디를 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금개는 본인이 말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타입인데 나는 그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웃기다는 감각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 스타일의 광대라고 할 수 있다. 첫 책을 내고 북토크를 하면서 금개는 "되고 싶었던 '작가'가 되어서 좋다"고 했는데, 딱히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작가가 되었다는 자각도 없는 나와 너무 대비되었다. <적정 코미디 기술>은 단연코 자신 있게 양서라고 말할 수 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는 당연히 잡았고 유익하기까지 하니까. 마감 전에 크로스 체크 겸 피드백 해준답시고 원고를 미리 읽으면서 몇 번이나 힝구 또르르 모먼트가 있었는지 모른다. 자기계발서를 패러디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자기계발서로서의 가치도 발휘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는 이 책이 두 권 있는데, 하나는 굉장히 특별한 에디션이다. 화장실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로 추정되는) 정연지가 서정의 가방에다 이쁘게 소변을 봐놨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이 책이 연지의 오줌 냄새까지 흡수하는 바람에. 북토크에서 깨끗한 새 책을 한 권 더 사면서, 나든 금개든 둘중 하나라도 언젠가 크게 성공해서 하나뿐인 연지 에디션이 경매에서 비싸게 팔리는 날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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